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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를 배우자.

안전자산 엔화는 왜 이렇게 망가졌나?

by 로칸 2022. 11. 4.

엔화의 현주소 - 엔화의 추락

아무리 킹 달러의 시대이지만 올해 엔화의 추락세는 유독 두드러진다. 심각한 경제난이나 금융위기를 겪는 것도 아닌 일본의 통화가치가 경제가 파탄난 나라들보다 더 크게 떨어졌다. 일본에서는 "잃어버린 30년"과 "아베노믹스의 외상값이 돌아왔다"라고 우려한다. 안전자산의 지위를 잃어가는 엔화의 현주소를 살펴보자. 1990년에 1억엔짜리 아파트를 샀다면 매달 갚아야 하는 원리금은 64만 엔 우리 돈으로 640만 원에 달한다. 반면 지금은 매월 25만 엔만 갚을 수 있으면 1억 엔짜리 아파트를 살 수 있다. 30년 전보다 월 상환액이 39만 엔 싸졌다. 39만 엔이면 오늘날 도쿄 도심의 고급 아파트를 임대할 수 있다. 아무리 버블 경기가 한창인 때였지만 매월 주택 대출로만 64만 엔을 갚아나갈 수 있는 일본인 가정은 별로 없었을 것이다. 반면 70% 이상이 맞벌이를 하는 오늘날 매월 25만 엔 정도는 어떻게 해볼 수 있는 가정은 크게 늘었을 것이다. 현재 1억 엔짜리 아파트를 사는 것과 같은 조건으로 1990년대 아파트를 사려면 4천만 엔짜리 밖에 못 산다고 분석된다. 이런 상황이니 매월 25만 엔만 갚으면 1억 엔짜리 아파트를 살 수 있는 지금은 빚을 내서라도 집을 사두지 않으면 손해 일 수도 있다. 집은 사는 게 아니라 빌리는 것이라는 인식이 뿌리 깊은 일본인들조차 집을 사기 시작하는 이유이다. 2015년부터 인구가 줄기 시작하고 30년째 소득이 제자리인데도 일본의 아파트 값이 사상 최고치인 이유도 여기에 있다. 지난해 일본의 수도권 신축 맨션 평균 가격은 6260만 엔으로 버블 경제 말기인 1990년의 6123만 엔을 넘어섰다. 올 상반기에도 평균 가격은 6511만 엔으로 사상 최고치를 이어가고 있다. 인구 감소, 소득 부진에도  부동산 시장은 활활 타오르는 미스터리의 정체는 바로 일본 은행이 2016년부터 밀어붙이고 있는 금리정책이다. 1990년 주택담보대출 금리가 연 7%였던 반면 현재는 연 0.3%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1990년 111조 엔이었던 일본의 부동산 대출 잔고가 올 3월 말 213조 엔으로 2배 가까이 늘어난 데서도 변화를 확인할 수 있다. 주택 대출 잔고가 일본 GDP의 40% 규모까지 늘었다. 이런데 일본 은행이 기준 금리를 인상할 수 있을까? 주택 대출 금리가 급등해 일본인들의 빚 부담을 늘릴게 뻔한데 말이다. 올초 113엔이었던 달러당 엔화 가치가 150엔까지 수직낙하한 가장 큰 원인은 미국과 일본의 금리차가 갈수록 벌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일본은행은 마이너스 금리 정책을 고수하는데 미국 중앙은행 FED는 11월 2일 FOMC에서 네 차례 연속 기준금리를 0.75% 포인트 올리는 자이언트 스텝을 밟을 것이 유력하다.  환율이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미국과 일본의 2년 만기 국채 금리차가 4.5% 포인트 넘게 벌어지면서 엔화를 팔고 달러를 사들이는 게 상식적인 움직임이 됐다.

엔화의 추락을 막기 가장 확실한 방법 - 금리인상?

엔화의 추락을 막기 가장 확실한 방법은 일본 은행이 기준금리를 올리는 것이다. 확실히 지금 현재 일본의 금융정책은 기형적이라고 할 수 있다. 유럽중앙은행이 지난 7월, 덴마크 스위스 중앙은행은 지난 9월 마이너스 금리를 해제하면서 일본은 세계의 유일의 마이너스 금리 국가가 되었다. 일본 은행은 2016년부터  단기금리를 -0.1%로 정하고 있다. 최근 일본 국회에서도 야당 의원들이 일본은행 총재를 불러다가 기준금리를 올릴지 말지 추궁을 하고 있다. 이런 상황이니 일본은행이 조만간 기준금리를 올려서 마이너스 금리를 해제할 것처럼 보였지만 반대이다. 구로다 총재는 9월 22일 일본은행 금융정책 결정회의 후 열린 기자회견에서  적어도 내년 4월까지는(자신의 임기 동안) 기준금리를 올리지 않을 것임을 분명히 했다. 이 발언으로 엔화 가치의 심리적 저항선인 150엔 선을 무너뜨리는 기폭제가 됐다. 총재 발언 직후 달러당 엔화 가치가 146엔까지 떨어지자 일본 정부는 24년 만에 외환 보유고의 달러를 팔아서 엔화를 매수하는 방식으로 외환시장에 직접 개입했다. 엔화 가치가 140엔으로 단숨에 6엔 가까이 올랐지만 개입 효과는 한 달도 못 갔다. 지난 20일 달러당 엔화가치는 32년 만에 처음으로 150엔 아래로 떨어졌다. 21일 밤 엔화 가치가 152엔까지 떨어지자 일본 정부는 또다시 외환시장에 개입해서 환율을 145엔까지 진정시켰다. 사흘 뒤인 24일에도 엔화 가치가 149엔으로 떨어지자 일본 정부가 세 번째로 시장에 개입했다는 관측이 나온다. 엔 달러 환율이 150 엔에서 뺏고 뺏으려는 일본 정부와 글로벌 자금의 공방전이 지구전으로 변해가는 모습이다. 일본 야당에서 엔화를 방어하기 위해 금리를 올리려고 선호하지만 일본뿐 아니라 해외 전문가들도 대부분 일본 은행이 대규모 금융완화 정책을 유지하는 게 타당하다고 동의한다. 그러나 총재가 여러 차례 지적한 대로 가뜩이나 경제가 불안한 일본이 기준금리를 성급하게 올렸다가는 자칫 잃어버린 50년의 장기침체를 불러올 우려가 있다는 것이다.

금리를 올리지 못하는 이유 - 천문학적인 정부 부채

1255조엔에 달하는 천문학적인 정부 부채도 금리를 올리지 못하는 이유이다. 지금도 이자로만 매년 8조 엔을 지불하는 일본 정부가 금리를 1%만 올려도 연간 이자 부담이 3조 7천억이 늘어난다. 지금도 국채 원리금을 갚는데 1년 예산의 25%를 쓰는 일본의 국가재정이 심각한 위기를 맞을 수도 있는 부담이다. 달러가 대부분의 통화에 대해 강세를 나타내는 킹 달러의 시다라고는 하지만 엔화의 추락 세는 유독 두드러진다. 올해 주요 통화 가운데 엔화의 하락폭은 터키의 리라 다음으로 크다.

안전자산 지위 상실 - 유독 심한 엔화의 추락세 

심각한 경제난이나 금융위기를 겪는 것도 아닌 일본의 통화가치가 경제가 파탄난 나라들보다 더 크게 떨어졌다. 엔화는 위기 때마다 가치가 급등하는 대표적인 안전자산이었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당시도 그랬고 2011년 동일본 대지진이라는 국가적인 재난을  입었을 때도 엔화 가치가 급락할 것이라는 예상과 반대로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최고치를 기록했다. 위기다 싶으면 글로벌 투자가들이 자금을 안전한 피난처라고 생각하는 엔화로 도피시키기 때문에 나타났던 현상이다. 하지만 2020년 코로나가 세계적으로 확산하고 올해 2월에는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하는 지정학적 위기가 발생했는데도 엔화 가치는 폭락했다. 사실상 안전자산의 지위를 상실한 것이다. 파이낸셜 타임스는 지난 21일 약한 통화가 국가의 미래를 약화시킨다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미일 금리차만으로는 기록적인 엔화 약세를 설명할 수 없고 단지 엔화가 안전자산에서 투기자금의 먹잇감이 됐다고 분석했다. 일본 내에서도 달러 강세와 엔화 약세를 구분해서 볼 필요가 있다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 미국 중앙은행의 급격한 금리 인상 탓에 엔화가 급락했다고 위안 삼을게 아니라 엔화 자체가 왜 이렇게 약해졌는지 따져봐야 한다.

안전자산 엔화는 왜 이렇게 망가졌나?

환율은 그 나라 경제의 실력을 반영하는 숫자라고 한다. 그런 점에서 엔화가 망가진 건 일본 경제가 망가졌기 때문이다. 일본의 경제 전문가들과 미디어들도 잃어버린 30년을 겪는 동안 구조개혁을 밀어두고 아베노믹스의 주요 대책인 초저금리와 엔저에 10년이나 의존한 외상값이 돌아왔다고 우려한다. 2012년 말 아베 전 총리 집권과 함께 시작된 대규모 금융 완화 정책의 부작용이 엔화 가치 32년 최저라는 형태로 나타난 것이다. 일본 경제를 일본이 자랑하는 수출품인 자동차에 비유해 보자. 먼저 브레이크와 과속방지 센서가 망가졌다. 과거에는 엔화가치가 급격히 떨어지면 브레이크가 걸렸다. 엔저가 되면 일본의 수출이 늘어난다. 일본 기업들은 수출로 벌어들인 외화를 엔화로 바꾼다. 엔화를 사려는 수요가 늘어나니까 저절로 엔저의 속도가 줄어들게 되는 것이다. 제어장치가 망가진 건 2010년에 엔화 가치의 급등을 피해서 생산시설을 대거 해외로 옮겼기 때문이다. 일본 생산 비율은 1990년 4.6%에서 2020년 22.4%까지 올랐다. 일본 기업의 해외 법인 수는 2020년도 25,700개로 2007년에 비해 54%가 늘었다. 상장기업의 해외 매출도 230조 엔으로 30% 늘었다. 반면 일본 경제라는 차량의 유지비는 엄청나게 늘었다. 휘발유 값이 치솟는데 연비는 절반 이하로 떨어진 탓이다. 일본은 에너지의 90%, 식료품의 60%을 수입에 의존한다. 올해 국제 원자재와 식료품 값이 급등하면서 가뜩이나 수입의 백수가 늘었는데 엔화 가치가 급락하면서 수입 부담을 증폭시키고 있다. 현재 엔화의 실질 환율은 달러당 엔화 가치가 360엔이었던 1973년과 같은 수준이다. 일본의 구매력이 50년 전 수준으로 후퇴했다는 의미이다. 그만큼 똑같은 액수의 에너지와 식료품을 수입하더라도 엔화가 두세 배 이상 들어가게 된다. 제어장치가 망가지고 연비가 떨어지면 차를 바꾸거나 핵심 부품을 업그레이드하는 게 정상이다. 경제정책으로 치면 구조개혁 이용해서 경제정책으로 치면 구조개혁 이용해서 경제 체질을 바꿔야 한다. 하지만 일본은 차를 업그레이드하는 대신 오랜 기간 엔진 성능 강화제를 넣어서 차를 과부 한 상태로 몰아가고 기름값을 줄이려고 저급 휘발유를 써왔다. 10년 가까이 인위적인 초저금리와 엔저의 의존한 상황을 말한다. 성능이 떨어진 차를 얼마나 억지로 굴렀는지 보여주는 통계가 있다. 현재 일본의 10년 만기 국채 금리는 0.25%이다. 시장이 결정한 금리가 아니다. 일본은행이 금리가 0.25%를 넘는 국채를 모조리 사들여서 인위적으로 눌러 놓은 금리이다. 리세이 기초연구소가 9월말 현재 일본 만기 국채의 이상적인 금리를 분석했다. 1.5%이다. 그런데도 실제 금리는 0.25%니까 이상적인 금리보다 1.3% 포인트나 인위적으로 낮춰져 있는 것이다. 그만큼 일본 정부가 일본 경제라는 차량을 무리하게 굴리고 있다는 뜻이다. 무리한 초저금리를 오랫동안 후유증으로 세계 최대 해외 자산이라는 안전장치마저 고장 나 버렸다. 일본 기업들이 해외 투자와 생산을 늘린 결과 수출이 줄었다고 했다. 대신 그만큼 해외 자회사로부터 벌어들이는 배당과 이자 수입은 늘어난다. 일본의 해외 자산은 400조 엔을 넘는다. 31년째 세계 1위를 유지하고 있다. 일본 기업들이 해외에서 외화로 벌어들인 배당과 이자 수입을 일본으로 가져와서 엔화로 바꾸면 마찬가지로 급격한 엔저를 제어하는 안전장치 역할을 할 수 있다. 하지만 일본 기업들은 배당과 이자 수입을 좀처럼 일본으로 가지고 돌아오지 않는다. 가지고 돌아온다 해도 달러로 쌓아둔다. 당연하다. 달러 가치는 오르고 엔화가치는 갈수록 떨어지는데 이걸 엔화로 바꾸면 바보인 것이다. 속는 셈 치고 엔화로 바꿔본들 일본의 현재 예금금리는 마이너스, 국채금리는 10년 동안 0.25%에 묶여있다. 투자할 때가 없다. 차라리 금리가 높은 해외 기업이 낫다. 1999년 484만 개였던 일본의 중소기업은 2016년 358만 개로 줄었다. 그런데 일본이 대규모 금융완화를 시작하기 직전인 2012년부터는 358만 개에서 358만 개로 크게 줄지 않고 있다. 2017년 이후 통계가 나오면 중소기업 수가 더더욱 줄지 않았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코로나 이후에는 일본 정부가 중소기업의 자금조달을 지원하기 위해 무담보 무이자로 돈을 빌려주는 일명 제로제로 대출을 실시했다. 코로나로 자금 압박을 받는 중소기업에 담비 역할을 했지만 한편으로는 경쟁력을 잃은 좀비 기업을 급격히 늘리는 조치라는 지적도 받고 있다. 일본에는 창업한 지 100년을 넘는 노포가 33,000개에 달한다. 전 세계 100년 기업의 41%를 차지한다. 전통을 보존하고 계승하는 일본 특유의 기업 문화로 세계인의 칭송을 받는 통계이다. 하지만 일본 내부에서는 수명만 길뿐 기업 가치는 늘리지 못하는 좀비 기업이 그만큼 많음을 입증하는 자료로도 사용되는 현실이다. 아무리 훌륭한 전통도 변하지 않으면 퇴색되고 만다는 점을 엔 달러 150엔 시대를 맞아 안전자산의 지위를 잃어가고 있는 일본의 통화 엔화가 증언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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