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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를 배우자.

도대체 중국과 대만 왜 싸우는 걸까?

by 로칸 2022. 10. 31.

중국과 대만 간 갈등 심화

출처 : 게티이미지

최근 러시아-우크라이나 사태에 이어 중국과 대만의 갈등이 부각되고 있다. 이들의 갈등이 나날이 심해지고 있는 가운데 중국은 '중국, 대만(China taiwan)'이라는 나라 이름을 쓰도록 대만에 요구했고 타국가에게 대만과 교류를 하지 못하도록 압박을 넣기도 했다. 그렇다면 비슷하면서도 다른 나라, 중국과 대만은 왜 이렇게 사이가 나쁜 걸까? 중국과 대만 간 갈등의 시작부터 현재까지 모습을 살펴보자.

하나의 중국을 위한 노력

우선, 중국에 대해 잠깐 살펴보면 중국은 한족을 비롯해 55개의 민족으로 구성된 다민족 국가이다. 약 12억명의 한족과, 이슬람교도인 위구르족을 비롯해 약 1억 명의 소수민족이 있다. 이 중에서 중국 사회에 완전히 흡수된 민족도 있지만 나름의 고유한 정치적 정체성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는 민족도 있다. 특히 위구르와 티베트는 지리적으로 분리되는 데다 문화적인 면에서도 중국과는 많은 차이가 있다. 때문에 몇몇 소수민족은 그동안 중국으로부터 독립을 추진해 왔으며 최근에는 홍콩까지 가세하였다. 하지만 어느 국가와 정부가 마찬가지지만 자신의 관할 내에서 독립을 하겠다고 나온다면 좋아할 수 없는 입장이다. 독립은 곧 영토의 손실이며 자국에 커다란 손해이기 때문이다. 독립을 한번 허용해주면 도미노 효과처럼 너도나도 반발을 일으키므로 중국 정부는 소수민족의 독립을 무마하기 위해 대책을 강구하고 있다. 중국의 시진핑은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새로운 카드를 꺼내 드는데 그것은 바로 동화정책이다. 시진핑은 자국 영토 내에서 전개된 모든 역사적 활동을 중국 역사로 편입하는 역사 공정을 전개하고 있으며 심지어는 소수민족을 중국화 하는데 노력하고 있다. 문제는 이 과정에서 수용시설에서의 고문과 강제노동, 성적 학대 등이 자행되고 있음이 밝혀졌고 심각한 인권침해를 이유로 지금 중국은 국제적인 비난을 받고 있다. 이렇듯, 중국 대륙에 인접한 홍콩과 마카오, 그리고 대만 역시 '하나의 중국'이라는 입장이며 중국이 꿈꾸는 '하나의 중국'을 이륙하기 위한 노력이 현재까지도 계속되고 있다.

중국의 혼란기 - 군벌시대

애당초 대만과 중국 본토의 관계가 긴밀해진 것은 17세기 명나라가 멸망하고 청나라가 건국되었을 때부터였다. 당시 대만 땅은 네덜란드가 통치하고 있었다. 정치가였던 정성공은 명의 멸망 이후에도 이곳에서 명나라의 맥을 잇고자 했다.그래서 정성공은 당시 대만 땅을 통치하던 네델란드 군을 몰아내고 이곳에서 청나라에 반대하는 활동을 전개했다. 하지만 정성공이 청의 공격에 패배하게 되고 청은 완전한 중국 지배를 달성하게 된다. 시간이 흘러 1911년 신해혁명으로 청나라가 무너지고 중화민국이 수립된다. 청나라가 무너짐에 따라 황제 전제체제도 무너졌지만 이곳에는 군벌로 불리던 군인 세력이 곳곳을 지배하게 된다. 그렇게 중국의 혼란기가 시작된다.

1차 국공합작(1924~1927)

제1차 세계대전이 막을 내린 이후에 1919년 어지러운 정세 속에서 새로운 중국을 목표로 하는 중국 국민당이 결성되었고 2년 뒤에는 중국 공산당이 창립되었다. 지금의 대만과 중국이 대립하게 되는 시초가 사실상 여기서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서로 다른 이념의 두 개의 당이 탄생하면서 이들은 계속해서 대립하지만 그 당시 군벌들이 전국을 활개 치고 있었기 때문에 두 당은 우선 군벌들을 토벌하기 위해 손을 잡고 이들을 쫓아내기로 약속한다. 양측의 국공합작으로 이들은 서로에 대한 견제를 멈추고 모든 힘을 군벌 타도에 집중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이것이 제1차 국공합작이다. 후에 군벌세력을 이끌던 장쭤린(1875~1928)이 패배하면서 군벌 타도는 성공했지만 이 과정에서도 국민당과 공산당은 계속해서 대립하였다.

2차 국공합작

1937년 7월 국민당과 공산당의 계속된 대립 중에 아시아에서는 일본이 대륙 정복에 나서면서 폭주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일본은 만주사변을 시작으로 중국 침략을 감행한다. 일본이 중국 땅에 들어오면서, 서로를 견제하던 국민당과 공산당은 일본에 맞서기 위해 또다시 협력을 해야 했는데 군벌 토벌에 이어 국민당과 공산당이 2차 국공합작을 약속한다.

국공 내전(1946~1949)

1937년부터 1945년까지 8년간 이어진 중일전쟁 기간 동안 중국인들은 이루 헤아릴 수 없는 피해를 입게 된다. 그리고 이 어마어마한 희생자를 낳은 중일전쟁은 2차 세계대전에서 일본이 항복함에 따라 종료된다. 그렇게 일본의 간섭에서 벗어난 중국은 국민의 여망을 배경으로 국민당의 장제스와 공산당의 마오쩌둥이 평화협정을 개최한다. 약 한 달 반 동안 충칭에서 장제스와 마오쩌둥이 만나 서로 싸우는 것을 피하고 각 당파의 평등한 지위를 인정해주는 합의를 도출해 낸다. 그러나 이러한 합의에도 불구하고 양측 간의 갈등은 계속해서 지속되었으며 어떠한 일이 있어도 내전을 피하고 신중국을 건설하자는 약속은 국민당이 본격적으로 공산당을 공격함으로써 파기된다. 마오쩌둥은 이에 맞서 강경하게 싸웠고 1946년 전면적인 내전으로 돌입하게 된다. 그것이 국공 내전(1946~1949)이다. 민심은 국민당을 떠나 공산당으로 기운 상황에서 국민당이 전투에서 전략적 실수를 함에 따라 공산당이 베이징, 난징에 이어 중국 대륙 최대 도시 상하이까지 손에 넣게 된다. 마오쩌둥의 공산당이 중국 전역을 휩쓸어 버린 것이다.

하나의 국가, 두 개의 정부

내전에서 승리한 중국 공산당이 1949년 10월 중화인민공화국을 건국하자 국민당은 대만으로 건너갔고 1차부터 2차까지 20년이 넘는 기간 동안 계속된 내전에서 공산당이 최후의 승자가 된다. 그리고 중국을 계승하는 각기 다른 두 개의 정부가 들어서게 된다. 하지만 더 큰 문제는 지금부터였다. 국공내전 이후 대만이나 중국이나 모두 하나의 중국을 표방하면서 자신들이 중국 대륙의 대표라고 주장했다.

대만의 외교 단절과 계속되는 대립

그러다가 UN이 창립될 때 UN의 상임이사국으로 대만이 중국 대륙의 대표로 이름이 올라가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중화인민공화국(중국)의 국력이 점차 강화되자 UN 회원국들은 대만이 아닌 중화인민공화국의 손을 들어줬다. UN총회에서 중국 대륙의 대표가 뒤바뀌는 역사적 순간이었다. 중국은 환호했고 대만은 좌절했다. 이 사건은 서방국들이 대만보다는 인구가 많고 힘이 센 중국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음을 의미했으며 대만은 힘의 논리대로 국제질서의 냉혹한 현실을 받아들여야 했다. 이에 대만은 UN총회에서 자진 탈퇴라는 대만 외교 역사상 최악의 결정을 한다. 대만은 '적(중국)과 함께 설 수 없다'라며 UN을 떠나는데 이 자진 탈퇴는 대만에 '외교의 단절'이라는 실로 대단한 악영향을 미치게 된다. 그렇게 1972년 일본이 대만과의 단교를 시작하면서 미국, 한국이 그 뒤를 이어 대만과 단교를 하게 된다. 중국과 대만의 운명을 가른 UN총회 사건 이후 많은 국가가 대만과 국교를 끊었다. 그리고 중국은 지금까지도 대만과 국교를 유지하는 국가에 '국교 단절'의 압력을 행사하고 있다. 당시 대만의 UN탈퇴는 현재까지도 대만이 국가의 지위를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는 데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다. 평창올림픽에 참가할 때도 대만은 대만이라는 이름을 쓰지 못하고 차이니스 타이베이라는 이름을 써야만 출전이 가능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하나의 중국'을 외치고 있는 중국은 대만을 중국의 일부로 생각하고 있으며 주권과 영토의 완결성을 위해 통일을 포기할 수 없다는 입장을 보이고 있다. 반대로 대만은 '하나의 중국' 원칙을 근본적으로 거부하고 독립적인 지위 확보에 힘쓰고 있다. 이렇듯 통일하려는 중국과 벗어나려는 대만의 대립은 현재까지도 계속되고 있으며 이 과정에서 불안정한 상황과 위기가 반복될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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